전날 휘몰아치던 바람은
비구름을 몰고 올려고 그랬나보다.
한두방울 내리던 비가 이내 눈이 되어서 내리더니
눈은 다시 비로 바뀌어 여름비 처럼 많이 내린다.
오래간만에 비다운 비가 내린다.
그동안 찔끔찔끔씩 내리던 비는
공기중의 황사를 고스란히 자동차 보닛에 내려놓고 도망가곤 했다.
봄에 내리는 비는 갓 새잎은 낸 나무에게는 생명수처럼 보인다.
새순에 내려 앉은 빗방울은 투명한 구슬이 되어 잎사귀의 굴곡면을 따라 흐른다.
나뭇잎과 빗방울의 만남을 한동안 처다보고 있으니, 숲속에 나와 앉아 있는 듯하다.
내리는 비를 처다보다보니, 내가 아파트라는 공간에 있다는 것을 잠시 잊게 해준다.
아파트의 저층에 사는 덕에
베란다에서 빗방울에 부딧치는 나무의 새순을 볼 수 있는 호사를 누리고 있다.
하루종일 비가 내려주는 바람에
졸지에 집에서 뒹굴뒹굴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그동안 미뤄왔던 아내의 정원을 촬영하기로 하였다.
저 멀리서 만두를 만드느라 정신이 없는 아내는
카메라를 들고 좁은 베란다를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나를
이상한 듯이 힐끔힐끔 쳐다만 볼 뿐 별 말이 없다.
이맘때면 예쁜 꽃과 더불어 매우 진한 향기를 뿜어내는 말발도리꽃이다.
주먹만한 모종이 몇해전에 우리집에 오더니,
이제는 아내의 정원에 주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조그만하고 하얀 꽃은 자세히 보아야만 그 생김새를 볼 수가 있다.
꽃은 작지만 꽃에서 내뿜는 향기는 커다란 벗꽃나무보다도 진하다.
이녀석이 꽃을 피우면 베란다에 진한 꽃내음이 넘쳐나며
거실에 까지 냄새가 넘쳐 들어온다.
향으로 따지자면 밀리지 않는 녀석이 있다.
자스민이다.
보라색 꽃으로 시작해서 흰색으로 변해가는 꽃이다.
자스민 꽃이 피기 시작하면, 거실과 베란다를 연결하는 창을 개방해 논다.
거실 창을 열어 제키면 바스민 향기가 온집안에 배여들기 시작하는 것도 대략 이무렵이다.
막내가 계룡산 황도예가에 가서 만든 작품이다.
다육을 처다보는 가족이란다.
아내가 올해는 산목한 주목을 가져다 심었다.
주목은 기개가 우람하여 높은 산에 자라는데,
아내의 정원에서 잘 자랄지 은근히 걱정된다.
햇볕이 좋아야 잘 자는 다육.
아내의 정원은 아파트 저층이라 햇볕이 약하다.
다육은 햇볕이 강해야 잘 자라는데,
아내의 정원에서 자라는 다육은 햇볕이 모자라서 비실비실한 다육이 되었다.
저 다육들을 때문에라도 어여 빨리 하루종일 햇볕이 드는 개인 주택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전남대 조교수님이 손수 구워주신 견군과 돈군이 정원의 다육을 지켜주고 있다.
몇해전에 아파트 화단에 철죽화분이 놓여 있었다.
철죽의 가지 모양으로 봐서 꽤 오래 된 듯이 보였다.
누군가가 이사를 위해 잠시 밖에 내다 놓은 것 같았다.
다음날 출근을 하려고 보니 어제 보았던 철죽화분이 그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침 교통 정리를 하는 경비아저씨가 있어, 철쭉화분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어 보았다.
경비 아저씨 왈, 어제 이사가는 사람이 버리고 간 화분이란다.
버려진 화분을 주워다 가꾼지 몇년이 지난 것 같다.
매년 봄이면 빨간색 꽃으로 집안 분위기를 잡아 주는 이녀석이 고맙다.
이제는 우리집의 메인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호야는 아직 꽃을 피우질 못하고 있다.
작은 꽃들이 뭉쳐서 공처럼 둥굴게 꽃을 피우는 호야,
어여 꽃을 피워서 너의 향기를 우리에게 선물하기를....
공간적으로는 좁지만 수종을 보면 좁지 않은 베란다의 정원.
아내의 정원은 좁지만 그 정원을 메우고 있는 나무와 꽃들은 적지 않다.
나리꽃이 어른키만큼 자라고
크고 작은 항아리가 수북히 쌓여 있는 장독대를
빙 돌아가며 둘러싼 정원에서
창포꽃을 다듬고 있는 아내의 모습을
다음 글로 올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